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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 브로크의 휴대폰은 요즘 이상할 정도로 조용할 틈이 없었다.
아침엔 더크 드리머에게서 연락이 왔다.
“놀러 오고 싶어 하는데, 그래도 될까?”
기숙사 시절이었다면 별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겠지만,
이제 더스틴은 혼자 사는 집이 생긴 심이었다.
누군가를 자기 공간으로 들인다는 건,
예전과 조금 다른 의미였다.
그래도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더크는 대학 생활에 대한 동경을 처음 품게 해준 친구였고,
여전히 가장 편한 사이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연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승진 기회가 있는데 도전해볼까?”

“오늘 밤 플럼밥 노래방 가볼래?”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더스틴은 그 사소함이 좋았다.
억지로 분위기를 만들 필요도 없고,
과하게 잘 보이려 애쓰지도 않아도 되는 관계.

그레타는 늘 더스틴의 말을 잘 들어줬고,
웃어야 할 타이밍엔 꼭 웃어줬다.
그게 생각보다 훨씬 큰 위로가 된다는 걸,
더스틴은 요즘 자주 느꼈다.

주말 데이트는 뉴크레스트의 레스토랑에서 이어졌다.
창가 자리는 아니었지만,
촛불이 켜진 테이블 하나만으로도 분위기는 충분했다.
더스틴은 최근 회사 이야기를 했다.
첫 직장,
처음 맡은 투자 업무,
그리고 여전히 가끔은 자신이 여기 있어도 되는 사람인지 헷갈린다는 이야기까지.
그레타는 턱을 괴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중간중간 작게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건 네가 잘해서 그런 거야.” 같은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건넸다.

그날 더스틴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
식사가 나온 뒤에도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더스틴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낡은 브로크 가의 욕실,
항상 빠듯했던 생활비,
형처럼 굴어야 했던 시간들.
그레타는 별다른 동정도,
가벼운 위로도 하지 않았다.
그저 끝까지 들었다.
그 태도 덕분에 더스틴은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운 이야기’처럼 느끼지 않았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그레타가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나중에… 정말 큰 집에서 살고 싶어?”
더스틴은 웃었다.
“당연하지. 엄청난 갑부 될 거라니까.”
그레타 역시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자신의 집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타르토사의 대저택도,
코델리아 테베 가문도,
어릴 적부터 정해진 결혼 이야기들도.
아직은 말하지 못했다.
대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더스틴 브로크의 여자친구이고 싶었다.

데이트를 마친 뒤 두 사람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식사는 끝났는데도,
괜히 물잔만 만지작거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더스틴은 문득 깨달았다.
이 관계는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안젤라와의 연애가 설렘과 불안이 함께 섞인 감정이었다면,
그레타와의 시간은 조용히 숨 쉬는 느낌에 가까웠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연락은 이어졌다.
“오늘 재밌었어.”
“다음엔 내가 장소 정할게.”
“그리고… 너 웃는 거 생각보다 귀엽더라.”
휴대폰 화면을 본 더스틴은 한참 혼자 웃었다.

더스틴 브로크는 돈을 함부로 쓰는 심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늘 부족한 집안에서 자랐고,
무언가 하나를 사기 전엔 꼭 가격표를 먼저 보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캐시백 데이” 알림이 뜨자마자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만 건축 모드 아이템 10% 환급.
누군가에겐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더스틴에겐 꽤 큰 기회였다.

사실 독립한 뒤 그의 집은 정말 최소한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작은 TV 하나,
중고 느낌 나는 소파 하나,
테이블도 제대로 없는 거실.
누가 보면 “성공한 투자자”보단
“막 대학 졸업한 사회초년생”에 더 가까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더스틴은 그게 싫지 않았다.
이 집의 물건들은 전부
자기가 직접 번 돈으로 하나씩 채운 것들이었으니까.
그래도 요즘 들어 조금씩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은 TV도 사고 싶고,
컴퓨터도 제대로 갖추고 싶고,
주방도 조금 더 사람 사는 집처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욕심을 가장 합리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날이었다.
더스틴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가구 목록을 비교했다.
“이건 환급받으면 실질 가격이…”
“아냐, 이건 성능 대비 너무 비싸.”
“차라리 조금 더 보태서 오래 쓰는 게 낫겠다.”
누가 보면 투자 보고서 분석하는 줄 알 정도였다.

결국 가장 먼저 바뀐 건 TV였다.
작고 낡은 브라운관 TV는 치워지고,
훨씬 커다란 평면 TV가 거실 중앙에 자리 잡았다.
소파 배치도 다시 정리했다.
혼자 사는 집인데도 괜히 시야 각도까지 체크하며 움직이는 모습이 꽤 진지했다.
TV를 켜본 더스틴은 괜히 만족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오… 이건 좀 성공한 사람 집 같은데.”

컴퓨터 역시 새로 들였다.
기존엔 노트북 하나로 대충 버티고 있었지만,
이번엔 아예 제대로 된 데스크 셋업을 만들었다.
듀얼 모니터,
정리된 책상,
헤드셋,
그리고 은은한 네온 조명까지.
정작 게임보다 엑셀 창을 더 많이 띄울 심이지만,
그래도 책상 앞 분위기만큼은 꽤 근사했다.
그레타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너 진짜 행복해 보인다.”
더스틴은 한참 웃다가 답장했다.
“이런 거 하나씩 사는 게 생각보다 좋네.”
주방도 조금 달라졌다.
아주 고급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예전처럼 ‘대충 끼니 때우는 공간’ 느낌은 줄어들었다.
더스틴은 새 조리대를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어릴 적 브로크 가를 떠올렸다.
고장 난 싱크대,
삐걱거리던 의자,
늘 빠듯했던 생활비.
브랜디는 늘 집을 어떻게든 유지하려 애썼지만,
“업그레이드”라는 단어는 그 집에 너무 먼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 순간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가전제품 쇼핑일 뿐이겠지만,
더스틴에게는 달랐다.
이건 처음으로,
“남은 돈”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며 쓰는 돈”이었다.

며칠 뒤 환불금 1,973시몰레온이 들어왔다.
알림을 확인한 더스틴은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이런 건 타이밍이지.”
그리고 바로 가계부를 열어
환급액까지 꼼꼼히 정리해두었다.
브로크 가 장남다운 습관은,
독립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그레타 로랑은 의외로 꽤 현실적인 선택을 한 심이었다.
폭스버리 공대에서 언어와 문학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그녀가 선택한 길은 법조계였다.
처음엔 주변에서도 조금 의아해했다.
문학 전공생이 왜 갑자기 변호사 일을 하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한 뒤,
그레타는 생각보다 이 직업에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을 좋아하고,이야기를 사랑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심이었지만—
돈의 흐름과 자산 관리 역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배워온 사람이기도 했다.

그레타의 개인 통장에는 현재 500,000시몰레온이 들어 있었다.
코델리아 테베 가문이
성인이 된 손녀에게 미리 증여한 자산 일부였다.
대저택 사람들은 그걸 “독립 지원금” 정도로 불렀지만,
일반 심 기준으로 보면 사실상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금액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레타는 그 돈을
명품이나 파티등 사교계 생활에 쓰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관심을 가진 건 ‘건물’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학교 수업 중 우연히 들은 도시 재생 이야기,
낡은 건물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다시 살아나는 과정,
그리고 더스틴이 종종 말하던 “안정적인 자산”이라는 개념.
그레타는 그 이야기를 꽤 오래 기억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그녀의 검색 기록은 조금 이상했다.
“임대 수익 계산법”
“세입자 만족도 높이는 방법”
“초보 건물주의 유지보수 비용”
“소형 상가 투자 위험성”
언어·문학 전공생 치고는 꽤 생활감 있는 관심사였다.
결국 그레타는 결심했다.
500,000시몰레온 중 일부를 사용해,
직접 작은 건물을 사보기로.
물론 가문 사람들은 탐탁지 않아했다.
“굳이 네가 그런 걸 직접 관리할 필요가 있니?”
“전문 관리인을 두면 되잖아.”
“괜히 이상한 사람들 상대하면서 스트레스받지 말고.”
하지만 그레타는 이상하리만큼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번만큼은,누군가가 정해준 삶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굴려보는 삶을 선택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시작엔 더스틴의 영향도 조금 있었다.
더스틴은 늘 말했다.
“돈은 그냥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굴리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그레타는 그 말을 웃으며 들었지만,
생각보다 깊게 남아 있었다.
요즘 그녀는 일이 끝난 뒤
혼자 부동산 매물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오래된 소형 상가,
세입자 둘 정도 들어갈 작은 건물,
관리만 잘하면 수익이 날 법한 낡은 주택.
그레타는 사진보다 꼭 직접 현장을 보는 편이었다.
벽 상태는 어떤지,
햇빛은 얼마나 들어오는지,
주변 분위기는 안전한지.
놀랍게도 그녀는 꽤 꼼꼼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다.
만약 정말 건물을 사게 된다면—
더스틴에게 언제 말해야 할까.
아직은 망설여졌다.
자신의 통장에 50만 시몰레온이 있다는 사실도,
가문의 이름도,
타르토사의 대저택도.
더스틴은 아직 모른다.
그리고 그레타는,
그가 자신을 돈이나 배경이 아니라
“그레타 로랑” 자체로 바라봐주길 바랐다.
그래서 오늘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더스틴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낸다.
“오늘 회사는 어땠어?”
그리고 동시에,
다른 창에선 소형 상가 매물 가격을 조용히 비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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